바른 한글 성경을 찾기 위한 길잡이이자 왜 바른 성경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으며 한글킹제임스성경과 개역/개정판을 비교하여 바른 성경의 기준을 세우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필독서이다.
성경을 볼때에 아무 구절이나 교회 시대의 교리로 삼는다든지,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면 사사로운 해석의 우를 범하게 된다. 이 책은 성경에 대해 닫혀 있는 눈과 마음을 뜨게 해주어, 성경을 왜 나누어서 공부해야 하고 어떻게 나누어 볼 수 있는지 알게 해주며, 궁극적으로는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수 있도록 해준다.
서문 중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성경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 그러나 성경을 구분하지 않고 공부하면 자꾸만 혼란과 의문만 가중된다. 예를 들면 시편의 내용은 믿음뿐 아니라 행위가 요구되며 좀 더 나아가면 율법 전체를 준수해야 형벌에서 면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시대에는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고,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선물이 된다. 그러나 대환란 시대를 겪는 사람은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이때에는 구원이 더 이상 하나님의 선물이 되지 않으며,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기 위해 끝까지 견디어야 한다.
환란이 끝나고 예수님이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을 세우시면 그 때는 보다 엄격한 생활 규범이 지켜진다. 의이신 주님께서 의로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 세상에서는 욕설이나 험담, 저주, 도둑질, 거짓말, 간음, 음행, 탐심, 불의, 불효, 불경, 사기 등 그 어떤 죄악도 용납되지 않는다. 오늘날 신문을 가득 메우는 추악한 사기, 강도, 유괴, 납치, 도박, 살인, 음란 행위, 동성연애, 술수 등 이런 죄들은 더 이상 등장할 수 없게 된다. 즉 마태복음 5,6,7장에서 제시된 산상설교의 내용을 지켜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80%가 닫혀져 있는 책이 되는 것처럼,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는 환란시대의 교리를 무시한 채 시편을 해석한다면 시편의 90% 정도를 틀리게 해석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가지 성경 주석서들이 있지만 이런 원칙을 모르는 채 이리저리 갖다 붙여, 영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해석해 놓지만 그런 것은 정작 성경을 해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주석가의 견해를 피력해 놓은 것일 뿐이다. 물론 성경은 어느 구절이나 역사적으로, 영적으로 적용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우리에게 대한 교리로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영적으로만 적용시켜야 할 구절들을 교리적으로 적용하여 우리에게 가져올 때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명기 14:24-26을 보라. 이 구절을 신약교회의 교리로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그 집안이 어떻게 되겠는가?
성경의 지식을 “진리의 지식”(딤전 2:4)이라 한다. 진리의 지식은 “절대 진리”이다. 이것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서는 안되는 지식을 말한다. 이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바른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함으로써 깨달을 수 있다. 틀린 성경으로도 진리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왜 구태여 바른 성경이 필요하겠는가? 성경의 참조 구절을 찾아 맞추다가 엉터리로 나타나면 그 성경을 그대로 두겠는가? 유명한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성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근본주의, 복음주의, 정통주의에 속했다고 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잘 알려면 먼저 바른 성경을 찾아가져야 한다. 그 다음 그 성경을 읽을 때 여러 번 읽을수록 깨닫는 정도가 커지겠지만, 그 이전 단계로 나눔의 원칙을 알고서 읽어야 한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전 10:3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무조건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사용할 때에 하나님의 진리는 왜곡되고 손상을 입게 된다. 그들이 차라리 자기들의 분량을 알고 자중하였더라면 훨씬 나았겠지만 안다고 설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이다. 배교한 신학자와 목사, 교수와 사역자가 바른 조명을 받은 적이 있었는가? 칼빈이나 루터가 개혁을 이룬 것은 어떤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이었다. 왜 개인이었는가? 개인의 신앙이 성숙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성도들도 칼빈주의, 근본주의, 보수주의, 정통주의, 복음주의에 속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칼빈과 같이 되고, 루터 같이 되고, 웨슬레 같이 되고, 근본주의자가 되고, 정통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신앙이 진리에 뿌리내릴 때 그 사람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치고 받고 하는 현실적 전쟁이 아니라 악한 정사들과 권세들과의 전쟁이며 또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둘째 하늘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다(엡 6:12).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기란 기관소총이나 로켓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화평의 복음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칼로 완전무장을 해야 한다.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면서도 성경을 모르면 기저귀 찬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아기가 이 영적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거듭난 어린 자들에게 즉시 말씀을 가르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그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